이승만 대통령의 업적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공과(功過)를 논할 때에 반드시 함께 논의되어야 할 분야가 있다면, 이승만 대통령과 기독교의 관계이다. 이승만 한성감옥에서 생활을 할 때에 기독교인이 되었으며, 회심의 경험은 그의 평생에 중요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는 이때부터 기독교 국가 건설을 꿈꾸었고, 미국에 가서도 한인기독학원, 학인기독교회 및 한인 YMCA를 창설하면서 기독교 전도와 교육에 열정을 쏟았다. 이러한 그의 삶의 배경이 원동력이 되어 그가 초대 대통령이 되었을 때, 기독교식의 개혁을 이루어갔다. 유교국가에서 기독교 국가로 바꾸고자 하는 그의 노력은 ① 국가의 주요 의례를 기독교식으로 행하고, ② 국기(國旗)에 대한 경례를 주목례(注目禮)로 대체하였으며, ③ 형무소에 형목(形牧)과 군대에 군목(軍牧) 제도를 도입하였고, ④ 정부의 주요 부서에 기독교인들을 대거 등용하였으며, ⑤ 기독교 선교를 목적으로 하는 언론 매체의 발달을 지원하였고, ⑥ 6·25전쟁 중과 그 이후에 외국의 기독교 구호단체들이 보내오는 구호금과 구호물자를 ‘한국기독교 연합회(KNCC)’를 통해 배분하도록 조치하는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기독교 교세 확장에 기여하였다.1) 그 결과 이 대통령 집권기에 정부의 19개부 장·차관 242명 가운데 38%가, 국회의원 208명 가운데 약 21%가 개신교 교인이었고, 이대통령의 집권기를 지나면서 기독교 교인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였다.2)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이승만이라는 한 사람으로 인해 이 모든 일들이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역사에 만약(if)이라는 가정은 있을 수 없겠지만, 만약 이승만이 아니라 그 시기, 그 자리에 다른 사람이 있었더라면 이러한 업적들을 이룰 수 있었겠는가? 생각해보면 이에 대한 답을 쉽게 내릴 수 있을 것이다. 본고에서는 이승만의 성장과정 가운데 기독교 사상이 어떻게 그의 삶에 영향을 주었는지 먼저 살펴본 후, 이후에는 초대정부의 기독교적 성격을 살펴보고, 마지막으로 6·25전쟁 이후 해외의 원조가 어떻게 한국기독교를 통해 제공되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 이후에 기독교 국가를 향한 이상(理想)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드러나게 되는 한계에 대한 평가로 마무리 하고자 한다.


기독교 국가 건설을 위한 꿈

이승만은 1895년 배장학당 영어부에 입학을 했다.3) 당시의 배제학당의 선교사들은 학생들을 전도와 선교의 대상으로 삼았으나, 이승만은 오직 영어수업에 참여하기 위해 배재학당에 입학하였다. 하지만 그 시간이 전혀 의미가 없는 시간은 아니었다. 그는 배재학당에서 선교사들의 교육을 통해 개인의 자유와 정치적 평등이라는 새로운 사상을 깨우치게 되었다. 이에 대하여 그는 “이런 정치원리를 알게 된 것만으로도 우리 같이 짓밟혀 사는 백성들에겐 큰 복이다.”고 말하였다. 배제학당에서 배운 민주주의 이념과 사상은 미국의 대의 민주주의 정치이념과 제의를 모방하도록 만들었다. 이런 영향과 더불어 이승만이 1899년 고종황제 폐위 음모 사건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한성감옥에 투옥되었을 때, 그는 기독교로 개종을 하였다. 그곳에서 한국 국민들에게 기독교를 전파하는 것을 생에 최고의 목표로 설정하였다. 그는 영국, 미국과 같은 문명국이 되기 위해서는 기독교 외에 다른 대안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런 사상을 가지고 이승만은 미국에 유학하여 기독교 국가 건설에 대한 그의 꿈을 점점 구체화 하였다.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한인기독학원, 한인기독교회 및 한인 YMCA를 창설하여 한인 교포들에게 기독교를 전하는데 심혈을 기울였고, 1919년에 영문 자료를 만들어서 미국인들에게 한국은 찬란한 역사와 문화를 가진 문명 강국이며, 3·1운동 후에 탄생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미국의 건국이념과 제도를 모방한 아시아권내 미국의 형제 공화국이라고 선언 하였다. 즉, 그는 이미 1919년부터 한국을 동아시아 최초의 기독교 국가라고 알렸던 것이다. 기독교 국가 건설에 대한 그의 꿈은 독립 운동기를 거치면서 영글어갔다.

 

<이윤영의원의 제헌국회 기도문. 좌-속기록, 우-속기록을 손으로 옮겨 쓴 기도문>

초대정부의 기독교적 성격

독립운동을 이끌며 임시정부의 주역이었던 이승만·김규·김규식의 ‘3영수(領袖)’는 모두 기독교인이었다.5) 이들 모두는 기독교 정신을 토대로 국가를 재건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김구는 “경찰서 열 곳을 세우기보다 교회 하나를 세우자”며 강한 나라는 성경위에 세워야 한다고 호소했고, 김규식은 “침략 받지 않는 강국을 세우려면 그리스도라는 반석 위에 세워야 한다.”고 말했다. 이승만도 “새로운 국가를 건설할 때, 만세반석 되시는 그리스도 위에 이 나라를 세우자”고 역설했다.4) 이들은 반탁-찬탁, 좌우합작운동, 단정-남북협상 노선 등 해방정국의 여러 국면들에서 정치노선의 차이를 보였지만, 결국은 개신교 신자 대다수와 국민은 이승만을 지지하여 이승만은 초대 국회의장으로, 또 이어진 대통령 선거에서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이승만은 해방이후의 대한민국을 기독교 국가로 운영하고자 했다. 그는 국회 개원식에 앞서 국회의원 전원을 자리에 일어서게 하고 이윤영 목사로 하여금 기도를 드리도록 했다. 또한 국회 개회식에서는 “오늘 제1차 국회를 열수 있게 된 데는, 첫째로는 하나님의 은혜와 둘째로는 애국선열들의 희생적 혈전한 공적과 셋째로는 우리 우방들 특히 미국과 국연의 공의 상 원조를 깊이 감사치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라는 말로 시작하였다. 국회가 처음 열린 날에 이승만 의장에 의해 4번, 이윤영 목사에 의해 4번, 국회의원 전원에 의해 1번, 하지 중장에 의해 1번 등 모두 10번이나 ‘하나님’의 이름이 공식으로 언급되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이승만 정부 때 허용된 친 개신교적 정책은 ‘국영방송’을 통한 선교활동이었다. KBS의 전신인 서울중앙방송국(HLKA)을 통해 선교 방송을 내보냈다. 이는 1954년 12월 기독교방송(CBS)가 개국 될 때까지 계속 되었다. 물론 선교방송은 다른 종교들에게도 허용이 되었다. 하지만 월 2-3회 선교방송의 기회를 가졌던 다른 종교들에 비해 매주 방송에 참여한 개신교는 더욱 많은 기회를 누렸고, 프로그램 또한 더욱 다채로웠다. 또한 기독교방송(CBS)가 개국하게 되자, 더 많은 사람들은 이를 청취하였고, 교회의 사회적 공신력을 높이고 교세를 신장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외에도 주일성수의 문제, ‘미신타파운동’ 및 ‘사이비 종교’ 추방 움직임들도 교회의 요구가 수용되어 진행되었다.

<1953년 미국 구호물자 인수식 참석한 이승만 대통령. 사진출처: 국가기록원>

해방 및 전쟁 시기 기독교 단체를 통한 구호

앞에서 살펴본 여러 내용과 더불어 기억해야 할 중요한 일이 있다면, 해방 및 전쟁 시기에 한국에 들어온 구호물자와 구호활동은 거의 기독교 단체를 통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전쟁 직후 피난민이 260만 명, 전쟁 이재민이 340만 명, 빈민이 430만 명 등 총 1000만 명이 구호의 대상자였다. 그러나 한국 정부나 민간단체는 이런 상황에 적절하게 대응할 수 있는 여력이 없었는데, 이런 상황에서 외국의 대규모 원조가 시작되었다. 원조는 국가 차원에서, 국제 연합 차원에서, 그리고 민간 원조 단체 차원에서 이루어졌는데, 외국의 기독교회와 구호 단체들은 어느 단체들보다도 활발하게 한국에 다량의 구호물품을 보내었다. 한국 전쟁이후에 1952년부터 50년대 후반까지 등록 된 기독교 외원단체는 40여개였는데, 미국 북장로교 선교회, 가톨릭 복지위원회, 감리교 선교회, 기독교 세계 봉사회, 캐나다연합교회 선교회 등이었다. 이뿐 아니라 1958년 11월까지는 총 10개국 59개의 외원단체들이 한국에서 활동했다. 이들의 구호활동이 한국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는데, 단적인 예를 들자면, 미국에 주소를 둔 위원단체들은 6·25 전쟁 발발인 1950년 7월부터 1952년 11월까지 전체 구호물자의 액수의 44%에 해당되는 1000만 달러에 해당하는 구호물자를 한국에 보내었다. 이러한 구호물자는 한국에 있는 여러 구호 단체들에 의해 한국 사람들에게 전달되었는데, 국제연합한국재건단(UNKRA), 기독교세계봉사회, 가톨릭주제위원회, YMCA 등 다양한 단체들이 동참했는데, 이 모두가 기독교 단체였다. 즉, 이승만 대통령이 기독교인으로 회심을 한 후 미국에서 활동하며 국내외적으로 기독교 국가임을 천명을 하였고, 또 이로 말미암아 국내에 기독교가 급성장하여서 외부에서 제공되는 구호물자들을 전달하는 도구가 될 수 있었다. 또한 외부의 구호물자를 통해 기독교는 더욱 교세를 확장해 나가면서 한국의 중요한 종교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이상과 현실

앞에서 살펴본 이승만과 기독교의 관계에서는 긍정적인 면만 진술되었다. 하지만, 이승만과 기독교의 관계는 곧 한국 현대사의 근간이기에 부정적인 평가도 피해갈 수 없다. 먼저, 기독교 국가를 건설하기를 꿈꿔왔고, 우리나라의 국회의 시작을 기도로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의 부패의 일선에 이승만과 기독교가 있었다는 책임을 회피할 수는 없다. 물론 이러한 평가는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극복하지 못한 것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그 당시의 신앙인들은 혼돈스러운 현실과 밀접하게 연결 되어있다는 한계가 있다.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해서 모두가 성경적 가치를 실현하기위해 살아간 것이 아니라, 국가와 민족이 우선되는 시기라는 것이다. 이러한 한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승만 정부 요직에 많은 수의 기독교인이 있었지만 참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하였다는 것을 보게 된다. 오히려 한국 정치판에 권모술수가 난무하고 권력 쟁취를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뼈아픈 유산을 남겨주게 되었다. 또한 이승만 정부 아래에 기독교가 괄목할만한 성장을 거두고, 외국 구호사업의 중요한 통로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구호품 분배 과정에서 일어난 부정부패, 싸움과 갈등, 재물에 대한 지나친 욕심 등은 한국 기독교의 어두운 과거로 지목이 된다. 특히 정부에 의해 성장한 교회의 모습은 이후 한국 기독교가 친(親)정부적 성향을 가지게 되는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이러한 부정적인 평가는 이승만과 기독교가 시대적 한계를 뛰어넘지 못하고 보여준 연약한 모습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만 대통령이 초대 대통령으로 국가를 위하여 헌신한 점, 자유민주주의 수호와 서구식 제도에 기틀을 놓은 점, 기독교의 발전과 원조로 인한 국가회복을 위해 헌신한 점들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위대한 일임에는 분명하다. 가히 외교천재라고 불릴 만큼 탁월함을 보였던 이승만 대통령의 모습은 불확실한 국제정세 속에서 살아가는 이 나라에, 어떠한 역량을 가진 지도자가 세워져야 하는지 잘 보여준다고 하겠다.